백제 성왕의 최후와 구천拘川
백제 성왕의 최후와 구천拘川
5세기경 옥천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정립하고 있으면서 세력 다툼이 치열했
던 곳이다. 이 무렵 옥천지역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국운을 건 싸움이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관산성 싸움은 신라가 대승하여 국위國威를 크게 떨치기 시작하였고, 이후 북방의
영토를 개척하는 등 장차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반면 백제는 26대 성왕聖王의 전사로
인하여 모처럼 꿈꾸었던 백제 중흥의 꿈이 무너진 채 멸망의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옥천
은 신라와 백제 간에 국운을 결정지은 격전장이었다.
관산성官山城은 554년 백제, 가야, 왜倭3개국 연합군이 신라군과 싸워 백제의 성왕, 좌
평佐平등 많은 장졸들이 전사한 옛 전장터였다. 이때 백제 성왕은 구천拘川에서 삼년산군
三年山郡의 고간高干도도都刀에게 붙잡혀 죽었다. 그런데 이 관산성 구천의 위치에 대해 학
자들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
먼저 ‘구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 찾을 수 있
다. 백제본기에는 “가을 7월에 왕(성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
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
게 해침을 당해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19)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천의 위치를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사 등 많은 사학자들은 군서면 월전리 군전마을
을 싸고도는 협곡으로 보고 있다.
이곳 바로 밑에 서화천이 구비 쳐 흐르고, 남북으로 1㎞ 가량 길게 뻗어있는 능선의 험
준한 벼랑을 ‘구전벼루’ 또는 ‘구진벼루’라고 부르고 있다. ‘구천’은 이 ‘구전’이 음운변화된
것이고, ‘벼루’는 이곳을 병풍처럼 두른 벼랑을 뜻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구천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진터벌 즉 진기평陳基坪으로 현재는 서정리 하천변이며, 여
기서 조금 올라가면 염장殮葬이다. 냇물 건너에 있는 고개 마루가 ‘말무덤’ 고개인데 ‘말’이
란 머리(頭, 首),임금(王), 마루(宗) 등 크다는 뜻이다. 이곳의 ‘말무덤’을 구천과 연관된 지명
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 고개에서 내려다 보이는 건너편에 군전軍田이라고 부르는
월전리마을이 있고, 구천 위에는 개산拘山이 있으며, 인근 오동리에는 진陣말랭이와 진陣
벌마을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구천을 중심으로 전쟁과 관련된 지명들이 있다.
다른 견해로 군북면 이백리에 ‘갯골’이란 작은 마을이 있고 마을 앞으로 계곡물이 흐르
고 있는데, 노고성老姑城의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갯골’을 한자음漢字音화 하면 구곡拘谷이
나 구천拘川이 된다. 그리고 이곳의 지명과 전설에 의하면 앞에 보이는 고리산성 바로 밑
의 골짜기를 ‘승지골勝地谷’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서 백제군이 신라군을 전멸시
켰다고 한다. 당시 고리산성에서는 백제의 태자太子인 창昌이 총지휘를 하고 있었고 신라
군이 이곳을 기어오르고 있었는데, 마침 도착한 백제의 성왕이 뒤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
두었다하여 ‘승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성왕은 태자와 함께 고리산성에 있
을 수 없다하여 성의 서쪽에 있는 노고성에 오르기 위하여 한밤에 갯골에 이르렀다가 신
라의 고간 도도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복병을 만나 백제의 성왕이 살해당한 위치가 구천으로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구
천이 군서면 월전리 마을을 싸고도는 서화천의 협곡이라면, 이곳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
인접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538년 왕도王都를 지역이 좁은 웅진(공주)에서 훨씬 넓
은 사비(부여)로 옮겨 국가체계를 정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夫餘라고 고치기도 하였다. 또한
식견이 탁월하고 두뇌가 명석하여 백제 중흥을 이루었다. 이러한 국왕이 국경 지대 부근
깊숙이 들어갈 이유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아직까지 구천의 위치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백제 성왕이 전사한 구천을 확실하게
조사하고 학계로부터 고증을 받아 발굴할 필요성이 있다.
백제 멸망과 숯고개炭峴
군서면이 대전광역시 동구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 식장산食藏山이다. 군서면 오동리 무중
골 뒷산에서 동쪽으로 쭉 뻗어 내려온 식장산 줄기에 큰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곳을 할미
봉이라 하며 이 봉우리에 할미성(老姑城, 노고성)이 있다. 이 할미성과 식장산 사이에 자루목
이 있는데 이곳을 사람들은 숯고개(炭峴, 탄현)라 부르고 있다. 할미성과 숯고개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예부터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백제의 이야기로 숯고개 양쪽에는 2개소의 성城이 있는데, 이 성을 쌓기 위해 백제인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백제의 노 충신忠臣부부도 참여하였는데, 부인은 부녀자들을 이끌고
숯고개 동쪽을 쌓고, 남편은 남자들을 이끌고 서쪽을 쌓았다. 성이 완성되자 동쪽은 할미
성, 서쪽은 할애비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성의 아랫마을은 무중골武中洞이라 부르고, 무사
武士들이 말을 먹였다는 마리들(하동리 지역)이 있다. 이곳은 천연의 요새였다.
삼국사기에는 탄현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처음 기록은 501년(백제 동성왕 23) 7월 탄현에
책柵을 설치하고 신라를 방비하였다는 내용이다. 이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는 이 탄현을 요
충지로 보았음이 틀림없다.
백제 멸망과 관련한 기록도 있다. 백제 의자왕이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리고 군비를
확장하는 등 영토 개척에 힘을 썼다. 그러나 국력이 강성해지자 이를 믿고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었다. 부여 백마강에 배를 띄우고 궁녀와 더불어 술과 노래로 나날을 보내게 되
자 좌평佐平성충成忠이 나라를 위하여 근신과 절제할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나 왕
은 오히려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니 감히 왕을 옳은 길로 갈 수 있도록 말하는 자가 없
어졌다. 성충은 옥에 갇혀 죽게 되었는데 임종 직전에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다른
나라 군사가 쳐들어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 또는 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수군水軍은
기벌포(伎伐浦: 금강하류)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서 그 험난한 곳에 의거하여 막
아 치는 것이 옳겠나이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이를 살피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어 귀양 가 있는 흥수興首에게 의자왕이 사람을 보내어 사태가 위급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당나라 군사는 무리가 많고 군사들의 기강이 엄정하며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협력하려 하므로 만약 평원平原에서 싸운다면 그 승패는 알지 못
하겠으나, 백강(白江: 금강) 혹은 기벌포와 탄현 혹은 침현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길목이므로
여기서 한 장부丈夫의 창을 휘두르면 만萬사람도 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용사를 뽑아 지켜서 당병唐兵들로 하여금 백강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신라
사람으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정중히
지키십시오. 그들의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의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진격하면 반드시 적
을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23)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귀양살이 중에 임금을
원망하면서 하는 말이라고 믿지 않았고, 왕도 대신들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이후 신라군
은 탄현을 넘고 당나라군은 백강으로 들어옴으로써 백제는 660년에 나라를 잃고 말았다.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탄현의 위치에 대하여 의견 차이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학
자에 따라 탄현의 위치를 부여와 공주 사이의 침현, 금산에서 진산으로 가는 백령산성, 옥
천과 대전 경계인 식장산 등으로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 식장산이면 산 전체를 말하는 것
이므로, 부분적인 지점인 군서면 오동리의 할미성과 숯고개를 연계하여 유력하게 해석할
수 있다. 아무튼 학계의 정확한 고증이 필요로 하는 역사적인 과제이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