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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땅 군서면 기행문 (옥천군지)

군서마을광장·9/10/2026·조회 0

백제의 땅을 가다-군서면기행문

옥천의 대부분 면 단위의 지형은 마을을 에워싼 산줄기를 따라 형성되었다. 청성, 청산,

이원면이 대표적이지만 그중에서 군서면은 면 자체가 커다란 산성 같다. 대전 산내동으로

이어지는 곤룡터널과 추부로 넘어가는 신평터널(상지리에서 소옥천을 따라 추부로 가는 길이 있긴 하

다.)을 제외하면 평야지대를 통해 군서면에 가는 유일한 길은 옥천읍을 통해서 가는 길이다.

식장산과 망덕봉을 경계로 대전과 망덕봉~제비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추부와

장령산~마성산~용봉을 사이로 옥천읍, 동이면, 이원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대부분 마을은 뒤로 명산을 하나씩 등지고 군서면을 관통하는 서화천을 바라보고 형성

되어있다. 군서면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서화천은 주변 높은 산에서 발원하는 많은 지류

에 의해 수량이 풍부하고 폭도 넓다. 상지리에서 시작하는 서화천은 금천리에서 시작하는

금천천과 동평리에서 합류하여 하동, 월전리를 돌아 군북면 이지당 앞을 지난다. 이 서화

천은 추소리, 이평리를 지나 대청호를 이룬다.

옥천읍 삼양사거리에서 성왕로를 따라 오르면 바로 군서면 월전리다. 월전리는 뱀처럼

굽이쳐 흘러가는 서화천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월곡月谷(다리골)과 군전軍田이 합쳐진 지

명이며, 서기 554년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전투인 관산성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54) 군

전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간에 치열한 전쟁이 있을 때 군대가 많이 주둔하였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한다. 서화천 옆 구진벼루에는 ‘백제 성왕 전사기’가 있다. 성왕은 신라 김

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과 전투 중인 아들 여창을 격려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그러나 성왕은 매복 중인 신라군에 의해 이곳 구진벼루에서 사로잡혀 참수

를 당하고 만다. 이처럼 군서면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이며 군사적 요충지였다. 군서

군서면 탐방 이동 경로

월전리는 삼국시대 역사 현장이다. 3세기 초부터 보은(報恩)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 축조되는 470년대까지 옥천은

신라의 세력권이었다. 백제의 중흥을 내건 성왕은 고구려에 맞서 신라, 가야와 함께 551년 한강 유역을 되찾았다. 그

러나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싸우는 사이,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이에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 진

흥왕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외교적 유화책을 썼으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554년 7월 국운을 건 싸움인 관산성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쟁에서 성왕은 구진벼루에서 목숨을 잃고 고리산성에 주둔하던 태자 여창(후에 위덕왕)은 간신히

빠져나갔다. 관산성전투 결과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백제와 신라의 국운을 건 싸움터인 월전리

의 중요성은 부각된다. 월전리를 중심으로 군대가 주둔했다고 해서 군전, 시체를 염하는 곳이라 하여 염장이, 옥천읍

에서 군서면으로 넘어오는 고개에 위치한 말무덤까지 전쟁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면을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에는 당시 쌓았던 산성들이 많다. 노고산성, 노구산성, 용봉산성, 상중리산

성, 독수리봉산성, 동평산성, 성재산성, 계현산성,사양리산성 등이 존재한다. 이 산성 중 동평산성만

이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고 뿐 다른 산성은 좀처럼찾아보기 어렵다.

월전리에서 오동리 가는길가 기독교수양관 앞뜰은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에 관련된 희생자들이

처형당한 곳이다.

보도연맹 사건은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다. 수양관 건물 외에 여타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공선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독교수양관을 지나면 바로 오동2리다. 오

동1리에서 오동교를 건너면 무중골(버스 정류장 이정표에는 무룽골로 되어 있다.)이다. 무중골 뒷산이

식장산 줄기다. 산 너머는 군북면 자모리다. 식장산 줄기인 뒷산에는 동북 방향에 있는 노

고산성(할미성)과 서북 방향에 있는 노구산성(할아버지성) 두 개의 백제의 성이 있는데, 성을 쌓

을 당시 할머니들이 쌓아서 할미성, 할아버지들이 쌓아서 할아버지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성의 존재를 알고 있는 주민을 만날 수 없었다.

식장산이 품은 마을들

무중골에서 오상길을 따라 작은 고갯마루를 넘으면 하동리 마고실이다. 마고실은 백제

시대 말을 기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백제시대 군대가 진을 치고 말먹이는 풀

을 재배하던 곳이라는 뜻으로 마릿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고실에는 충민사가 있다. 순국선열 김순구 선생의 영정과 25인의 항일투사의 위패를

모셨다. 김순구 선생은 1867년 마고실에서 태어났다.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체포된 25인

의 고향 동지를 구하고 구속된 후에도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충민사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서화천 너머 용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용봉에 있는 용봉

산성은 군서면 들판이 잘 보이는 데 위치하여 망루형 산성으로 추정한다. 마을회관 옆에

는 마고실 선돌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 있다. 높이 120㎝에 두께도 얇고, 너비도 널지 않

은 작고 까무잡잡한 선돌이다. 마을에서는 ‘탑’이라 부르며 탑제를 지낸다고 하는데, 선탑

월전리 앞 서화천

에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가 걸려 있다. 마고실에서 하동교를 건너면 한국전력 신옥천변

전소가 있고 변전소 바로 옆에 마을이 있다. 서화천 옆 용봉 아래 자리잡고 있지만 변전소

의 위세에 눌린 모습이었다.

마고실에서 오상길을 따라 한 고개 더 넘으면 상중리 상동이다. 고개를 내려오니 경부

고속철도 수직구 공사로 분주했다. 상동(안동오리) 입구에서 보니 식장산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찬다. 사실 상중리산성과 독수리봉산성의 흔적을 찾아 상동에 왔지만 산성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 오를 수 있는 식장산 등산로를 따라 정상 바로 아래로 건물이

보인다. 구절사란 절이다. 1393년 무학 자초가 창건하였다고 하니 오래된 절이다. 1933

년에 중건했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깎아지는 절벽에 절을 세웠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상

동에서 고개를 넘으면 오상길은 그 수명을 다하고 사양1길로 이어진다. 마을에서 곤룡터

널을 넘으면 대전 산내동이다. 예전 곤룡재(골내미재)는 나뭇짐을 지고 대전으로 넘어가던

주요 길이었다. 터널은 2000년 완공되어 이제 수고스럽게 골내미재를 넘지 않아도 된다.

사양리는 특히 삼국시대 백제의 최전방 기지로서 마을의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무려 네 개의 성터가 있어 전방 요충지로서 중요한 구실을 했던 마을이다. 북쪽으로부터

사양리산성, 망덕봉 망루, 계현산성, 국사봉 망루에 이르기까지 백제가 신라의 침략을 막

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있다. 이중 대전을 거쳐 부여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인 닭재

를 지키려는 중요 기지가 계현산성이다. 닭재는 망덕봉에서 남쪽으로 논골에서 대전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사양리에서 면 소재지 쪽으로 내려오면 은행리를 만난다. 원래 양심이란 이름이었는데

조선초기 이곳을 지나던 도사가 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으니 ‘은행이’라 부르면 잘 살 수

있다 해서 은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은 마을 입구에는 은행나무 대신 190년이

훌쩍 넘은 왕버들나무가 마을을지키고 있다. 상은 마을이 윗양심이고, 아랫마을이 아랫양심이

다. 윗양심이에는 은행리 상은 1호, 2호, 3호 선돌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일 년에 한 번 이

선돌에 정성스럽게 제를 올린다. 선돌은 아주 작았다. 총 세개의 선돌이 나란히 있었는데

가운데 있는 선돌은 ‘돌장승’ 또는 ‘장군석’이라 하며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 돌장승 양쪽으로 남성, 여성을 상징하는 선돌을 배치하였는데 특이한 배치

라고 한다. 언뜻 봐서는 그냥 돌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선돌에 묶여 있는 새끼줄과 앞에

놓인 초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마을에서 그 돌을 중하게 여긴다고 파를 뽑고

계시던 아주머니가 한 말씀 하신다.

면 소재지인 동평리는 동산리와 평곡이 합쳐진 이름이다. 면소재지는 다른 면소재지에

비해 번화하지 않았다. 식당도 2∼3개 정도이고, 슈퍼도 군서초등학교 주변에 몇 개 있는

정도다. 군서초등학교는 1909년 군서면 은행리에 지역 유지들의 후원으로 설립된 화명학

교가 근간이다. 1921년 군서공립보통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은 이래 1925년에 은행리에서

동평리로 이전했다.

예전 군서면에서 옥천읍으로 오가는 큰 길을 성재라고 했다. 성재 정상에는 동평산성이

있어 신라가 접경에 쌓은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성재를 넘으면 옥천읍 양

수리와 마암리에 닿는다. 동평산성 북서쪽은 주로 경계토록 쌓았고 서쪽은 급경사면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지형이다. 정상에서 보면 서화천을 중심으로 동평리, 은행리, 사

정리의 넓은 뜰이 펼쳐지고, 망덕봉, 말동산, 홍산 멀리는 식장산, 서대산이 한눈에 들어

온다. 반대쪽에서는 옥천을 조망할 수 있다. 산성이 자리 잡은 산은 멀리서 보면 규모가

큰 왕릉같다. 성의 높이는 3∼4m 정도이며, 다른 성들에 비해 원형의 모습을 많이 갖추

고 있다. 사실 성이라고 하나 성곽의 높이도 높지 않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돌탑

은 자연석 돌무더기로 보이기도 한다.

은행리와 마주 보고 있는 사정리의 자연마을로는 사기점, 살구정이, 마전동, 구억말, 말

래 등이 있다. 사정리 버스정류장에 사정리 동구밖 시골길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

내도를 보니 안골, 백두재, 방화골, 당산, 깊은골, 가는골, 등덕골 등 정 가는 지명들이 많

다. 사기점은 고려 때부터 사기그릇을 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뒷동산 사구밭에는

자기 파편 조각이 널려있어 가마터로 추측하고 있다. 사기점에는 또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절터 흔적은 한 가정집에 남아 있다. 기록이 없어 절의 이름이나 창폐 연대를 알 수 없으

나 현재 1개씩 남아 있는 탑 옥개석과 장대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

한다고 기록에 전한다. 탑 옥개석과 장대석이 남아 있다는 집을 수소문하여 찾아 들어가

니 대문은 열려있었으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문 옆 한 칸짜리 문간방이 있고 작은 돌

위에 흰색의 돌이 얹혀있는 돌이 장독대 옆에 있었다. 앞에는 향을 피우는 그릇과 정화수

를 떠 놓는 그릇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금천을 오르다

금산리는 홍산~제비봉~장령산~마성산이 이룬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금천천을

오르다 만나는 첫 마을이 증산리다. 증산리 마을 반대편 증산교를 건너면 아버지의 신주

가 불에 타자 불에 뛰어들어 죽은 김영복 효자와 김영복 효자의 현손인 김건의 효자문이

있다. 효자문 옆에는 병든 어머니가 있는 여막이 불에 타자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

었다가 함께 타죽은 김건의 몸종 옥금의 효녀문도 있는데, 옥천의 유일한 노비 효녀문이

다. 효자비각 안에는 두 효자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효녀문은 작고 아담한 규모로

‘효녀노비옥금지려’라는 글이 걸려 있다.

금천리는 수려한 금천천이 흐르는 서대산 자락인 제비봉과 장령산 아래에 위치한다. 음

짓말과 양짓말 두 마을로 금천천을 사이에 두고 형성되어 있다. 음짓말은 뒷산이 해를 가려

그늘이 많이 지고, 양짓말은 서남향이라 해가 많이 든다. 오후 4시가 넘어가니 음짓말은 이

미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양짓말에는 큰절이 있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고암 정립 선생이 금천사金川寺에서 공부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까지 절

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에는 물을 받았던 큰 석조와 부도가 있었다고 하나 절의

다른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작은 도랑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석조만 볼 수 있었다. 석

조는 한 두 사람이 좌욕을 즐길만한 크기로 네모 반듯한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금천리 바로 위는 장령산자연휴양림이 있다. 금천리도 펜션들이 천을 따라 조성되어 있

다. 장령산휴양림은 시설 사용료도 저렴하여 여름뿐만 아니라 연중 많은 사람이 찾는 곳

이다. 휴양림 야외음악당 옆에는 폐쇄된 철광굴이 있다. 금천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

한다. 1965년부터 3년 정도 철광석을 캤다고 한다. 폐광 입구는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설치물로 막혀 있다. 설치물에는 정지용의 시 「향수」의 한 구절과 광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최대한 굴 쪽으로 얼굴을 향하니 굴의 규모도 크고, 에어컨처럼 찬바람이 불어왔다.

잘 다녀 갑니다

장령산휴양림 탐방을 끝으로 옥천 여행은 끝이 났다. 산과 강을 따라 무작정 떠난 옥천

여행,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이’ 꿈인 듯 춤인 듯 옥천 여행을 마쳤다. 십여 차례

에 걸친 옥천행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여행은 무작정 떠나야 맛인데 누군가를 만나

야 하고 무언가를 느껴야 하는 부담감은 여행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그러나 옥천의 마을

을 하나둘 지나칠 때마다 굳이 무엇을 느끼고 적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점점 사라졌다. 반

대급부로 온종일 마을을 돌아다니고 돌아오면 정작 무엇을 써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 것이

다. 한번은 같은 마을을 두 번 다녀가야 했다. 돌이켜보니 아쉽다. 단순한 정보만 전달하

고 끝맺은 옥천 여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전 국토의 70%가 산인 나라이니, 어디를 가도 풍경은 비슷할 것이다. 산과 물이 허락한

만큼 밭을 일구고 집을 짓고 살아간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연의 순리에 맞는 것이란 생각

이 이번 여행을 통해 들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너무 넓다. 산을 파헤쳐 아파트를 짓고

영역을 넓혀간다. 높은 건물과 수많은 자동차가 열을 짓는 도시의 가로에서 수많은 사람

은 하루 해가 어떻게 저무는지도 모른 체 바쁘게 살아간다. 잠시 도시를 떠나는 여행이었

지만 엄마 품처럼 포근히 안아준 옥천의 산과 강, 사람들 덕분에 다시 돌아온 도시의 삶이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가 많은 것은 아니다. 정지용 시인 생가와 금강유원지, 장

령산휴양림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수많은 지류와 하천 그

들을 키운 많은 산들, 발길 닿는 곳마다 풍경이 되는 마을들은 어디나 기분좋은 산책길이

다. 게다가 마을마다 반갑게 손잡아준 어머니들,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말을 건네주신 우

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어머니, 잘 다녀갑니다.

출처:옥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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