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리의 청자와 백자요지
요지窯址
요지라 함은 ‘토기, 질그릇, 도자기, 기와, 벽돌, 숯 따위를 굽던 가마가 있던 터’를 말하
며 도자기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로 나눈다. 도기는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초벌구이를 한
다음 잿물을 입혀 구운 오지그릇과 그릇을 만들어 잿물을 씌우지 않고 구워서 윤기 없는
질그릇이 있다. 자기는 고령토高嶺土인 흰 흙으로 만든 사기그릇을 가리킨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도자기, 토기, 기와 등을 많이 만들어 썼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질이 우수하고 독창성이 뛰어나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까지 전국적
으로 많은 가마터가 남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도자기가 우리 전통문화 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뛰어난 문
화이면서도 가마터가 일제강점기 이후 너무 많이 도굴되고 파괴되어 없어지고 있다는 사
실이다. 여기서는 도자기 중에서 자기磁器를 굽던 자리와 기와를 굽던 자리를 중심으로 소
개하고자 한다.
① 사정리의 청자와 백자요지
군서면 사정리에 고려청자와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가마터가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은
예부터 그릇을 구웠다하여 사기점이라 불리고 있다.
가마터는 사정리의 등덕골登德谷, 등덕골 입구, 요골窯谷입구의 밭 등 3개소가 있다. 사
기점마을에서 600m 지점의 계곡인 등덕골은 청자와 분청사기를 굽던 곳이고, 사기점마
을 뒷편 100m 지점인 등덕골 입구와 요골 입구의 밭은 조선백자를 굽던 곳이다.
등덕골의 청자요지에서는 그릇 파편과 도지미(도자기 구울 때 사용했던 받침)가 다수 발견되었
다. 도지미마을 사람들은 어릴 때 이것을 주워서 둥글게 다듬어 공기놀이를 하였다고 한
다. 지금은 잡초가 무성해 요지를 찾기에 어려움이 있다.
1982년 단국대학교 정영호 박사팀이 조선시대 비취색이 나는 고려 순청자, 상감청자,
분청사기 등 수많은 파편과 초벌구이 된 그릇 등을 수습하고, 그릇을 구울 때 사용하는 도
지미 등도 찾아내어 12세기에 유행하던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로 확인한 바 있다.
또한 1983년 관성동호회 답사에서 ‘사선司膳’이란 글자가 쓰여진 청자 편 바닥과 ‘대大’ 자
가 박힌 사기 편을 수습하였다. ‘사선’은 고려 때 임금이 식사를 맡아보던 관청 ‘사선서司膳
署’, ‘대’ 자는 고려 때 임금이 쓰는 물건을 조달하는 관청 ‘대관서大官署’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곳 가마터가 관요지官窯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7)
백자를 굽던 2곳의 요지에서는 사발과 대접 등 주로 생활도구들이 수습되며 장식용 백
자는 보이지 않는다. 백자를 굽던 여러 곳의 가마와 수많은 백자 편, 도지미가 널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큰 가마터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몇 십 년 전만해
도 밭 언저리에 자기 조각이 무수히 쌓여 있었는데 농작물 경작 등으로 많은 양이 소실되
어 지금은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요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에 원군으로 왔을 때 사정리에 좋은 그릇을
굽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명나라 군사들이 삽시간에 이 마을로 달려와 그릇을 빼앗아 본
국으로 실어갔다. 또 왜군이 들어왔을 때는 많은 도공陶工들을 잡아갔다. 이때 도공들이 그들
의 작품을 빼앗길까 두려워 그릇 2섬(4가마)을 땅에 파묻어 두었다. 그런데 1910년 한일합병 후
일본인이 들어와 이를 모두 파갔다. 또한 요지에서 200m되는 지점에 그릇의 재료가 되는 백
토白土가 나왔는데, 그 위치는 지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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