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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의 전개

군서마을광장·9/15/2026·조회 0

관산성전투 전쟁 시기와 백제의 공격 경로


B 교수의 ’금강뱃길과 포구의 사회사‘ 논문을 보면 ’일본 외무성 통상국에서 발간한 1894년의 보고서를 보면, 1890년대까지는 부강포구 상류에도 100석 이하의 선박이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1885년 1월부터 약 4년에 걸쳐 철도부설을 위하여 사전에 지형을 탐사하였던 일본인 기사(技師) 송전행장(松田行藏)의 탐사기록에 따르면, 1880년대 이전에는 물이 많을 때에는 금강 본류를 따라 대청댐보다 상류에 위치한 옥천과 영동까지도 50석을 실은 배가 올라갈 수 있었으며, 합강리에서 미호천을 따라 직선거리 약 25㎞ 지점에 위치한 오근장(충북 청주시 상당구 오근장동)까지 선박이 왕래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라고 언급하였다.


장마이후 50석 실은 배가 옥천과 영동까지 왔다는 내용이고, 부여에서 금강으로 옥천(관산성)에 올 때 상주로 가는 화인진(현 인포리 주변)을 지나 옥천으로 오므로, 상주나 경주가 공격 목표라면 옥천을 경유할 이유는 없으나, 옥천(관산성)은 정리하여야 할 신라 땅이다.


금강으로 병력을 이동하려면 많은 배가 필요한데, 일본서기에 관산성 전투에 지원된 왜군은 1,000명과 말 100필을 40척의 배인데, 이 기준이라면 10,000명의 병력을 금강으로 보낸다하더라도 400척의 배가 필요하다. 금강으로 공격 시 수백척의 배가 좁은 강물을 타고 올랐을 것인데, 더 멀리 가는 배를 먼저 보내야 배끼리 충돌하는 사고를 예방할 수 있으므로 왜군이 소속된 백제 5방 중의 하나인 東方군을 상주쪽을 공격하는 백제의 주공보다 먼저 보냈을 것이고, 또한 화인진 점령은 삼년산성(보은)과 굴산성(청성,청산면)으로부터 교통이 끊어져 관산성 고립을 의미하고 신라의 지원군이 와야할 길로 적군인 백제군이 공격해오니 관산성의 신라군의 사기는 떨어졌을 것이므로 백제는 잔당 처리 수준의 병력으로도 점령이 가능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7월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에서 백제 여창이 화인진에 상륙하여 신라에 들어가 싸운 대상은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인데, 각간과 이찬은 진골들만 받을 수 있는 직책으로, 양기석교수는 각간(角干) 우덕(于德)은 상주 군주이고, 이찬 (伊湌) 탐지(耽知)는 경주에서 급히 파견된 중앙군의 대장으로, 상주의 주군과 경주에서 파견된 중앙군이 백제 여창과 싸워 방어했으나 불리하여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같이 방어하였고, 이들이 싸운 지역은 화인진에서 상주사이로 보여진다.


성왕은 왜 구천에 왔는가


일본서기에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新羅는 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 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일본서기에 성왕은 여창이 전쟁의 피로를 위로하기 위해 구천으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신라 습격을 위해 50명의 병력으로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는 내용도 있다. 단지,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에 무리해가면서 구천을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 같고, 50명의 병력으로 왕이 신라를 습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일본서기에 여창이 돌아가신 성왕을 받들기 위해 출가하여 수도를 하고자 했다. 라는 기록은 성왕이 구천까지 오게 된 원인이 여창에게 있다고 추정된다.


관산성 전투는 여창이 주도는 했으나 성왕의 전쟁으로 전쟁 전에 성왕과 여창이 큰 틀의 작전 계획을 했을 것이다. 공격목표가 서울과 경주를 연결하는 상주라면 최소한 상주쪽 백두대간의 고개 정상을 확보해야 다음 전투가 유리해지는데, 여창이 구축한 구타모라새 위치가 백두대간에 미치지 못한 곳으로 추정되어 성왕과 같이 계획한 작전이 수정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성왕은 여창의 작전변경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아 직접 현장 확인을 위해 호위병 수준의 병력 및 보좌진(좌평 4명)으로 급히 야간에 구천을 지나다가 신라군에게 매복 습격 당하게 되는데, 성왕의 구천 방문의 명분은 여창에 대한 위로로 백제군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보면 시기는 음력 8월 15일 추석 전후로 보인다.


구천은 어디인가.


구천(狗川)의 위치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2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A교수 등 사학자들이 군서면 월전리 군전부락을 감싸고도는 협곡인 구진베루(구전벼루)로 비정하는 견해로 지리적 조건과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삼국시기 성곽들, 그리고 전쟁관련 지명의 존재, 전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대체적으로 이곳을 구천으로 비정하고 있다. 두 번째는 구천을 군북면 이백리의 갯골(식장산 자랏)로 보는 견해로 전설에 의하면 환산성 밑의 골짜기 이름이 승지골인데 이곳에 신라군이 기어오를 때 마침 이곳에 도착한 성왕이 이 광경을 보고 배후를 급습하여 대승을 거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성왕이 여창과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환산성 서편의 노고산성(할미성)에 오르기 위해 한밤에 갯골에 이르렀을 때 신라 비장 도도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는 내용으로 갯골이 성왕이 죽은 구천이라 하는 견해이다.


구진벼루는 지형조건으로 보아 험준한 절벽을 이루고 있어 성왕이 이 곳에서 어떤 이유로 냇물을 건너려하였다는 것으로 보고 어렵고, 갯골 전설도 환산성과 그 부근 성지는 규모가 너무 협소하여 백제의 많은 병력이 주둔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지적으로 다시 실체에 대한 해명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관성동호회에서 성왕은 식견이 탁월한 인물로 적과 대치하고 후퇴하는 입장에서 지형지물이 최악인 군서면 월전리 앞의 구천(拘川)을 과연 택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총체적인 지휘를 한다 하더하도 일국의 왕이 직전 깊숙이 까지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이런 점들을 살펴 본다면 갯골이 구천(拘川)이라는 주장에 다소 수긍이 간다라고 하면서 구진벼루가 구천이라는 점에 의문점을 제시하였다.


신라·백제격전지(관산성) 지표조사보고서에 ‘구진베루’는 구진이 혹은 구천(狗川)의 변화된 명칭이거나, 적어도 구진(狗津)이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여 천(川)과 진(津)은 우리말 ‘내’와 ‘나루’로서 혼용된 예가 있어 특히, 백제의 경우 오늘날 공주가 웅진(熊津)인 동시에 웅천(熊川)으로도 표기되었다. 즉, 웅진(熊津)이 후일 웅천주(熊川州)로 불렸던 것이다. 따라서 ‘구진’을 구진(狗津)으로 표기할 수 있다면 구천(狗川)이라고 표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라고 기술하였다. 구진벼루가 구천이라고 확신이 아닌 추정을 하였다.


관성동호회는 구진벼루를 구전으로 불리어서 구천이라고 기록하였다. 반면에 백제의 왕도 부여에서 육로로 관산성으로 온다면 부여 - 논산 – 흑석동산성 – 사정성 – 이산성(소호동산성) - 계현성(닭재) - 구진벼루 - 관산성에 이르렀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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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옥천향수신문(http://www.okhs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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